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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정공>암농공휘종현(연승)묘갈명(巖農公諱鍾玹(淵昇)墓碣銘)
巖農公諱鍾玹墓碣銘 公諱鍾玹字燦汝巖農其自號也趙氏系出玉川以高麗門下侍中諱璋爲始祖再傳諱佺 恩贈玉川府院君是生諱元吉號農隱官侍中與圃冶諸賢定策立勲封玉川府院君子姓仍貫焉是生諱瑜號虔谷官副正居喪廬墓當麗運訖守義罔僕晩下順天考終 世宗朝以孝 命旌入我 朝諱斯文 贈吏議是生諱智崙察訪四昆季友愛甚篤扁亭以相好三傳諱大春號三灘官校尉與河西玉峰諸賢爲道義交又三傳諱時聖號觀水亭通德郎以孝 命旌寔公九世祖高祖諱元淳曾祖諱仁根祖諱得燁以壽階通政副護軍考諱亨奎妣豊川任氏相休女有婦德以 高宗丁卯九月三日生公氣宇峻㠜才器超凡摳衣請業于吾王考文忠公淵齋先生之門多得聞爲己之學性且篤孝事親盡誠前後居憂持制甚嚴朔望拜墓不避風雨待族以恩無間親疎接人應物亦有周急之風見人之窮好施與也本州校宮及明倫堂主張重修而別立規模斥絶陋習義理明辨一以忠信爲符鄉黨莫不敬服至於奉先葺祠竪碑靡不殫誠建塾立師敎子義方處昆季友愛尤篤埍箎甚樂晚與奇松沙宇萬從遊講討經義交契甚重每春秋良辰倣三賢古事携朋船遊於漾碧江上嘯咏忘歸仍作白鳥詞三絶焉戊辰八月十二日考終享年六十二墓大龜村西麓先兆下壬坐原訃到遠近人莫不悲悼曰君子逝矣配海州呉氏學黙女持身恭謹孝順有德六親咸稱 高宗戊辰四月九日生丙戌九月二十八日卒墓與公同崗異兆酉坐原生二男二女男長東洙出系伯父后次致洙女適安鍾燮柳秉起孫男貞勲重勲曰箕勲過房出安碩淳東淳章淳柳承容外孫也過房胤東洙䝴公行錄徵銘於余余非玄晏終辞不獲嗚呼公之才學可以爲需世之用而終未展蘊抱沈淪於遐陬者豈非命耶然鄉里之稱誦欽慕久而不沫則是可銘也己銘曰 吁嗟趙公質美才良以孝以學令聞孔彰鄉里誦慕迄今彌長公自不朽奚待揄揚有欲知公觀此銘章 從仕郎孝德殿參奉 德殷 宋在晟 撰 암농공휘종현묘갈명(巖農公諱鍾玹墓碣銘) 공의 휘는 종현(鍾玹)이요, 자는 찬여(燦汝)며, 암농은 그 자호고 옥천조씨인데 고려 문하시중 휘 장(璋)을 시조로 재전하여 휘 전(佺)을 증 옥천 부원군이요, 생휘 원길(元吉)의 호는 농은이요, 벼슬은 시중인데, 포은, 야은 제현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훈공으로 옥천 부원군에 봉하였다. 생휘 유(瑜)의 호는 건곡이요, 벼슬은 부정으로 초상 때 시묘하고 고려의 운수가 다하자 절의를 지켜 숨었는데 늦게 순천에 내려와 고종하니 세증조에서 충효로서 정포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휘 사문(斯文)은 증 이조참의요, 생휘 지륜(智崙)은 찰방으로 四형제 우애가 심히 두터워 정자를 시어 상호(相好)라 이름하였다. 삼전하여 휘 대춘(大春)의 호는 삼탄인데 벼슬은 교위로 하서(河西) 옥봉(玉峯) 제현과 더불어 도의로 교유하였고, 또 三전하여 휘 시성(時聖)의 호는 관수정이요, 통덕랑인데 효도로서 정포하였으니 곧 공의 九세조이다. 고조 휘 원순(元淳), 증조 휘 인근(仁根), 조 휘 득엽(得燁)은 壽職으로 통정 부호군이요, 고의 휘는 형규(亨奎)며, 비는 풍천 임씨(豊川任氏) 상휴(相休)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었다. 고종(高宗) 정묘년(一八六七) 九월 三일에 공이 출생하였는데, 기량이 준걸하고 재기가 영탁하여 옷을 걷어 들고 학업을 우리 왕고 문충공 연재 선생의 문하에 청하여 爲己之學을 많이 얻어 들었다. 성품이 또 효도에 독실하여 어버이를 섬기며 정성을 다하고 전후 거상에 예제를 심히 엄하게 가져 삭망 성묘를 풍우를 피하지 않고 겨레를 은혜로서 대접하며 친·소의 차이 없이 사람을 접대하고 불건을 대할 때 급난을 구제한 풍도가 있으며 사람의 곤궁한 것을 보면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였다. 본 고을 향교 명륜당 중수를 주장하고 특별히 규모를 세워 더러운 폐습을 척절하며 밝게 가리어 한결같이 충신으로서 부신을 삼으니 향당이 경복하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선영을 받드는데는 사당을 수리하고 비를 세우는데 정성을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학당을 세워 스승을 맞아 들여 자제를 옳은 길로 가르치며 형제 우애가 더욱 독실하여 질장고와 피리로 심히 즐거워하였다. 늦게 송사 기우만(奇宇萬)을 종유하여 경전의 뜻을 연구하고 교분이 심히 두터웠다. 매양 봄 가을 좋은 때에는 삼현 고사를 모방하여 벗을 끌고 양벽강 상에 배를 띄워 놀며 휘파람과 시를 읊으며, 돌아 가기를 잊어버리고 인하여 白鳥詞 三絶을 지었다. 무진년(戊辰年) 八월 十二일에 향년 六十二세로 별세하니 묘소는 대구촌 서록 선조하 임좌원(大龜村西麓先兆下 壬坐原)이고, 부음이 발표되자 원근 사람이 슬퍼하지 아니한 자가 없었으며, 「군자가 가셨다.」하였다. 부인은 해주 오씨(海州呉氏) 학묵(學黙)의 따님으로 몸가짐을 공손하게 하고 효순하며 덕이 있으니 육친이 다 칭찬하였다. 고종(高宗) 무진년(一八六八) 四월 九일에 출생하여 병술년( ) 九월 二十八일에 졸하니 묘소는 같은 산 기슭에 자리가 다른 유좌원(酉坐原)에 있다. 남 동수(東洙)는 백부 후사로 출계하고 치수(致洙)요, 딸은 안종섭(安鍾燮), 유병기(柳秉起)의 처며, 손자는 정훈(貞勲), 중훈(重動)이고, 기훈(箕勲)은 과방출이며, 안석순(安碩淳), 동순(東淳), 장순(章淳), 유승용(柳承容)은 외손이다. 과방남 동수가 공의 행록을 싸가지고 나에게 갈명을 청함으로 내가 하늘 같이 맑지 못한지라 끝까지 사절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아! 공의 재주와 학문으로 가히 세상에 쓰일 것인데 마침내 쌓인 포부를 펴지 못하 고 먼 시골에서 늙은 것이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향리의 칭송이 오래 희미하지 아니한즉 가히 새기겠다. 이렇게 명한다. 슬프다. 조공이여 吁嗟趙公 체질이 아름답고 재질이 좋아 質美才良 효도와 학문으로서 以孝以學 명성이 심히 빛났다. 令聞孔章 고을과 마을에서 외고 추모하여 鄉里誦慕 이제까지 길게 끄니 迄今彌長 공이 스스로 현양하니 公自不杇 어찌 칭송을 기다릴 것인가. 奚待揄揚 공을 알고자 한 자 있으면 有欲知公 이 새긴 글을 보라. 視此銘章 考德殿參奉 德殷 宋在晟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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